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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밤, 나는 소프트웨어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아이들이 잠든 뒤의 컴퓨터 책상이었다. 낮에 회사에서 풀리지 않던 문제를 AI에게 던졌더니, 몇 초 만에 답이 돌아왔다. 훌륭한 답이었다. 내가 며칠을 붙잡고 있어도 그만큼 정리하지 못했을 것이다. 처음 얼마간은 그저 신기했다. 그런데 그 밤은 조금 달랐다. 신기함의 끝에서, 서늘함이 올라왔다.

경이와 서늘함은 한 끗 차이였다.

그 서늘함의 정체를 한동안 들여다봤다. 두려움인가 하면, 그것만은 아니었다. 큰 파도가 오기 전, 물이 빠져나가는 해변에 서 있는 사람의 예감에 가까웠다. 무언가 거대한 것이 오고 있다는 확신과, 나는 준비가 되어 있는가라는 질문. 이 글은 그 질문을 오래 굴려 본 기록이다. 투자자로서, 직장인으로서, 그리고 두 아이의 아빠로서.

혁명은 언제나 낯선 얼굴로 온다

지금 벌어지는 일을 이해하려고, 나는 자꾸 과거를 돌아보게 된다.

1865년 영국은 ‘적기조례’라는 법을 만들었다. 자동차는 시내에서 시속 3킬로미터를 넘지 못했고, 차 앞에는 붉은 깃발을 든 사람이 걸어가며 마차들에게 위험을 알려야 했다. 마차 산업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이 법은 30년 넘게 버텼고, 그사이 자동차 산업의 주도권은 영국에서 독일과 미국으로 넘어갔다.

전기도 비슷했다. 에디슨이 전구를 켠 뒤에도 공장들이 증기기관을 걷어내고 전기 모터 중심으로 생산 라인을 다시 짜기까지 30년이 넘게 걸렸다. 인터넷은 어땠나. 1990년대 말에는 저명한 경제학자조차 인터넷의 경제적 영향이 팩스 기계 수준에 그칠 것이라고 내다봤다.

패턴은 매번 같았다. 처음엔 장난감 취급을 받고, 다음엔 회의론에 부딪히고, 어느 날 공기가 된다. 공기가 되고 나면 아무도 그것을 혁명이라 부르지 않는다. 그냥 일상이라 부른다.

흥미로운 사실 하나. ‘컴퓨터(computer)‘는 원래 기계가 아니라 직업의 이름이었다. 계산하는 사람. 기계가 그 일을 대신하면서 직업으로서의 컴퓨터는 사라졌지만, 바로 그 자리에서 프로그래머라는 직업이 태어났다. 혁명은 일자리를 지우면서 동시에 만든다. 세계경제포럼의 일자리 보고서도 같은 이야기를 한다 — 2030년까지 9,200만 개의 일자리가 사라지는 대신, 1억 7,000만 개가 새로 생긴다고.

다만 이번 파도가 이전의 파도들과 결정적으로 다른 것이 하나 있다. 속도다.

기술별 1억 사용자 도달 시간 비교 차트 — 전화 75년에서 챗GPT 2개월까지, AI 시대 보급 속도의 가속

적기조례의 시대에는 파도를 30년쯤 구경할 여유라도 있었다. 이번에는 그 여유가 없을 것이다.

혁명은 믿지 않는 사람에게만 갑자기 온다.

파도를 구경한 사람과 올라탄 사람

투자자로서의 나는 이 대목에서 오래된 질문 하나를 꺼내게 된다. 철도의 시대에, 전기의 시대에, 인터넷의 시대에 — 부는 어디에서 만들어졌나.

답은 매번 같은 방향을 가리켰다. 파도의 위였다. 혁명이 올 때마다 시장의 무게중심은 옮겨 갔고, 그 이동을 미리 받아들인 자본과 뒤늦게 인정한 자본의 성적표는 갈렸다. 말로만 하면 공허하니, 직접 숫자를 돌려봤다. 방법은 단순하다. 기술의 파도에 더 가까이 서 있던 나스닥100과, 시장 전체의 평균에 가까운 S&P500을 최근 15년간 나란히 놓았다.

결과는 이렇다. 같은 100을 넣었을 때 S&P500은 약 7.5배, 나스닥100은 약 14배가 되었다. 연으로 환산하면 각각 14.4%와 19.3%. 고작 5%포인트 차이처럼 보이지만, 15년의 복리는 그 차이를 두 배 가까운 격차로 벌려 놓았다.

나스닥100과 S&P500의 15년 누적 수익 비교 차트 — AI 시대 기술 파도에 편승한 투자의 복리 격차

다만 이 숫자에는 각주가 필요하다. 최대 낙폭 -35%. 파도 위에 있던 사람도 자산의 3분의 1이 사라지는 구간을 지나야 했다는 뜻이다. 그리고 더 무서운 각주는 차트 바깥에 있다. 2000년의 닷컴버블이다.

그때도 인터넷은 진짜였다. 가짜였던 것은 가격과 시간표였다. “인터넷이 세상을 바꾼다”는 문장은 옳았지만, 그 문장에 아무 가격이나 지불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었다. 나스닥은 고점에서 80% 가까이 무너졌고, 훗날 세상을 바꾼 아마존조차 90%의 하락을 통과해야 했다. 흐름이 옳아도 계좌가 먼저 죽으면 소용이 없다.

버블은 혁명의 반증이 아니라, 혁명의 부작용이다.

그래서 나의 주관적 결론은, 방향에는 베팅하되, 속도에는 베팅하지 않는다. 어떤 기업이 최후의 승자가 될지 맞힐 자신이 나에겐 없다. 대신 흐름 전체를 담는 쪽 — 이를테면 지수나 ETF 같은 도구 — 에 적립식으로, 잃어도 삶이 흔들리지 않을 몫만큼만 싣는다. ETF는 개별 종목을 고르는 눈이 없어도 흐름에 올라탈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지만, 테마에 쏠린 만큼 출렁임이 크고 기대가 이미 가격에 상당 부분 반영되어 있다는 점은 감안해야 한다. 파도에 올라탄다는 건 서핑보드에 몸을 묶는 일이 아니라, 파도가 부서져도 다시 헤엄쳐 나올 수 있는 상태를 유지하는 일이다.

지식의 왕좌가 넘어가는 순서

경제적인 관점이 파도의 한쪽 면이라면, 다른 쪽 면은 훨씬 근본적이다. 이 파도는 우리의 일상과 능력의 정의 자체를 바꾸려 하고 있다.

체감으로 말하면 이렇다. 작년의 최고 모델이 올해의 평범한 모델이 되는 것을 몇 번이나 봤다. 변호사 시험을 상위권으로 통과했다는 뉴스가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수학올림피아드급 문제를 푼다. 이 속도가 유지된다면 순서는 자연스러워 보인다. 특정 작업을 돕는 지금의 AI에서, 인간 수준의 범용 지능인 AGI로, 그리고 언젠가는 인간 전체의 지적 능력을 넘어서는 ASI로. 시간표는 전문가마다 몇 년에서 몇십 년까지 다르지만, 방향만큼은 나에게 당연한 수순처럼 보인다.

그 방향이 맞다면 한 가지는 분명해진다. 지식의 경쟁에서 인간은 더 이상 AI를 감당할 수 없다. 저장할 수 있는 양, 읽는 속도, 연결하는 범위 — 어느 것도 인간의 생물학이 이길 수 있는 게임이 아니다.

이 문장 앞에서 한참을 서성이다가, 뜻밖의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주산학원이다.

과거에는 주산 급수증이 취업 스펙이던 시절이 있었다. 은행 창구의 경쟁력이 주판알 튕기는 손끝에서 나오던 시절. 그러다 전자계산기가 책상마다 놓였고, 주산학원 간판은 조용히 내려갔다. 암산이라는 능력이 사라진 게 아니다. 그 능력에 시장이 지불하던 ‘가격’이 사라진 것이다. 내비게이션이 길 외우는 능력의 가격을 지웠고, 검색이 암기의 가격을 지웠듯이.

그렇다면 이제 첫째가 학교에 들어갈 나이에 다가오는 아빠로서, 이 질문을 피할 도리가 없다.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한 입시 공부는, 계산기 시대의 주산 급수증이 되는 게 아닐까.

입시라는 게임의 본질이 ‘누가 더 많은 지식을 정확하게 재생하는가’라면, 그 게임의 최강자는 이미 인간이 아니다. 아이가 어른이 되어 살아갈 세상에서, 지식의 양으로 겨루는 능력의 가격은 주산 급수증이 걸었던 길을 따라갈 가능성이 높다고 나는 본다.

오해는 하지 말자. 공부가 필요 없어진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공부의 ‘목적’이 바뀐다는 이야기다. 지식을 머리에 쌓기 위한 공부의 가치는 떨어지겠지만, 생각하는 근육을 만들기 위한 공부 — 이해하고, 의심하고, 연결하고, 끝까지 버텨 보는 훈련 — 의 가치는 오히려 올라갈 것이다. 계산기가 나왔다고 수학적 사고가 무의미해지지는 않았다. 사라진 것은 주판이지, 수학이 아니었다.

20대 시절의 나에게 스마트폰 이후의 일상을 설명할 수 없었듯이, AI 이후의 일상도 지금 우리의 상상력 바깥에 있을 것이다. 확실한 것은 하나다. 그 일상에서 ‘안다는 것’의 의미는 지금과 같지 않다.

젠슨 황의 답 — 인성과 회복탄력성

그러면 지식이 아니라면, 인간에게는 무엇이 남는가.

이 질문을 붙잡고 있던 시기에, 엔비디아의 젠슨 황이 스탠퍼드 학생들 앞에서 했던 말을 만났다. 요지는, 성공을 만드는 것은 지능이 아니라 인격이며, 인격은 똑똑한 사람이 아니라 고통을 통과한 사람에게서 만들어진다는 것. 그는 졸업을 앞둔 학생들에게 “충분한 양의 고통과 시련”을 겪기 바란다는, 축원치고는 이상한 축원까지 건넸다. 세계에서 가장 앞선 AI 칩을 만드는 사람이 AI 시대의 경쟁력으로 꺼낸 단어가 연산도 코딩도 아닌 인성과 회복탄력성이었다는 사실이, 나에게는 오래 남았다.

처음엔 의아했는데, 곱씹을수록 이보다 정확한 답이 없었다.

인성부터 보면, AI는 공감하는 문장을 쓸 수 있다. 위로하는 말투도, 배려하는 표현도 학습한다. 하지만 흉내와 존재는 다르다. 새벽에 달려와 주는 것, 자기 손해를 감수하며 약속을 지키는 것, 실수 앞에서 “제 책임입니다”라고 말하는 것. 신뢰란 결국 책임질 수 있는 존재에게만 줄 수 있는 것인데, AI는 아무리 유능해져도 책임을 질 수는 없다. 모두의 능력이 AI로 상향 평준화될수록, 역설적으로 사람을 가르는 기준은 능력이 아니라 됨됨이가 된다.

회복탄력성은 더 절실하다. 회복탄력성은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능력이 아니다. 넘어진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는 힘이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상처를 성장의 재료로 바꾸는 힘이다. 심리학은 이것을 ‘외상 후 성장’이라고 부른다. 같은 시련을 겪고도 어떤 사람은 트라우마에 갇히고, 어떤 사람은 그 일을 계기로 이전보다 단단해진다. 파도처럼 변하는 시대에 계획은 반드시 어긋난다. 직업이 바뀌고, 배운 것이 낡고, 어제의 정답이 오늘 틀린 답이 되는 세상이라면 — 가장 오래 살아남는 능력은 ‘다시 시작하는 능력’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것은 AI가 끝내 가질 수 없는 능력이다. AI는 실패해도 아프지 않다. 아프지 않은 존재에게는 극복의 서사도 없다. 인간의 성장만이 고통이라는 데이터를 먹고 자란다.

AI에게 넘어가는 능력과 인간에게 남는 능력을 좌우로 비교한 인포그래픽 — AI 시대의 인성, 회복탄력성, 질문, 생각의 고유성

지식은 이제 빌릴 수 있다. 빌릴 수 없는 것만 온전히 내 것이다.

지식의 시대에서 지혜의 시대로

여기까지 오면 남는 질문은 하나다. 그 ‘빌릴 수 없는 것’의 정체는 무엇인가.

모두가 같은 AI를 쓰는 세상을 상상해 본다. 모두의 보고서가 매끄럽고, 모두의 분석이 그럴듯하고, 모두의 결과물이 상향 평준화된 세상. 그런 세상에서 차이는 어디서 생길까. 나는 두 군데라고 본다. 무엇을 물을 것인가, 그리고 왜 그것을 원하는가.

답이 흔해질수록 질문이 귀해진다. 같은 도구를 쥐고도 어떤 사람은 남들이 보지 못한 질문을 던지고, 어떤 사람은 남이 시킨 질문만 반복한다. 둘을 가르는 것은 지식의 양이 아니다. 자기만의 관점 — 세상을 자기 눈으로 보고 자기 언어로 정리해 온 시간의 축적이다.

그래서 나는 다가올 시대에 필요한 힘을 이렇게 바꿔 부르고 싶다. 다양한 지식보다 번뜩이는 지혜. 무언가를 최상으로 잘 해내는 능력보다 생각의 고유성. 정답을 빨리 찾는 능력보다는 해답을 즉, 창의적으로 미래를 그리고 그것을 현실로 만들어 가는 능력.

비유하자면 모두가 같은 물감을 갖게 된 시대다. 이제 그림의 차이는 물감에서 나오지 않는다. 화가에게서 나온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준비한다

고찰은 길었지만 결론은 손에 잡히는 것이어야 한다. 대단한 전략이 아니라, 흔들릴 때마다 돌아올 나의 기준점이다.

하나, 자산의 방향을 파도에 맞춘다. 앞서 적은 그대로다. 속도를 맞히려 하지 않고, 방향에 꾸준히, 분산해서, 오래 싣는다. 혁명의 시간표는 늘 틀렸지만, 방향은 틀린 적이 없었다.

둘, 매일 쓴다. 파도를 알고 느끼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물에 들어가 보는 것이다. AI를 기피하는 사람과 부리는 사람의 격차는 지금 이 순간에도 매일 벌어지고 있다. 나는 일에서도 글쓰기에서도 AI를 도구로 손에 익히는 중이다. 구경꾼으로 남지 않는 것 — 그것이 개인이 할 수 있는 가장 싼 투자다.

셋, 아이에게는 성적보다 넘어지는 연습을. 시험 점수보다 넘어졌다가 일어나는 경험을 많이 만들어 주고 싶다. 작게 실패하고, 그 실패가 세상의 끝이 아니라는 것을 몸으로 배우는 일. 회복탄력성은 강의로 가르칠 수 없고 경험으로만 쌓인다. 그리고 사람은 사람 속에서 큰다. 공감도, 신뢰도, 책임도 — 전부 사람 사이에서만 자라는 능력이다.

넷, 기록한다. 생각의 고유성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길러지는 것이라고 믿는다. 나에게는 이 블로그가 그 훈련장이다. AI가 초안을 도와줄 수는 있어도, 무엇을 쓸지, 왜 쓰는지, 어떤 삶에서 길어 올린 이야기인지는 빌려 올 수 없다.

다섯, 몸과 마음의 체력을 지킨다. 회복탄력성의 토대는 결국 체력이다. 잘 자고, 움직이고, 무너져도 회복할 여백을 남겨 두는 것. 파도가 길어질수록 필요한 것은 순발력이 아니라 지구력이다.

다시, 어느 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아이들은 잠들어 있다.

첫째는 이제 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되어가고, 둘째는 아직 세상 모든 것이 처음이다. 너희가 이 글을 읽을 나이가 되면 AI는 아마 공기처럼 당연해서, 아무도 그것을 혁명이라 부르지 않을 것이다. 그때의 세상이 어떤 모습일지 아빠는 감히 다 그리지 못한다.

다만 이것만은 적어 두고 싶다. AI가 모든 답을 아는 시대가 와도 AI에 사고력 마저 위임하지 않기를. 너희만의 질문을 잃지 않기를. 넘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기를 — 넘어짐은 실패의 증거가 아니라 도전이며, 회복탄력성의 재료니까. 그리고 지식으로는 이길 수 없는 상대와 겨루느라 소모되지 말고, 오직 너희만이 될 수 있는 존재가 되기를.

파도는 온다. 막을 수 없다. 그러나 파도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해변에 남고, 파도를 아는 사람은 헤엄치는 법을 배운다.

아빠는 오늘도 헤엄치는 법을 연습한다. 이 글도 그 연습의 일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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